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차이콥스키 기념관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차이콥스키 기념관
글/사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작곡연대: 1893년
초연: 1893년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연주시간: 약 47분
아프도록 슬픈 백조의 노래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 교향곡 제6번 ‘비창’ B단조, Op.74
1890년 차이콥스키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일방적인 단교를 당한 뒤 치유 불가능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오던 차이콥스키는 마음속에 슬픔만을 남긴 채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과 염원을 마지막 교향곡에 쏟아 붓기 시작한다.
만년의 차이콥스키는 매일 아침 8시경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저는 자주 미사에 갑니다. 밤기도도 합니다. 주말 밤 거룩한 향기에 쌓인 작고 낡은 교회에 찾아가 그 어스름함 속에서 자신을 살펴보며 영원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봅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실패를 신앙에 의지하곤 했다. 그가 남긴 ‘베스페르’(저녁기도)와 ‘리투르기’(미사곡)는 이러한 작곡가의 깊은 종교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사회적응의 실패와 끝내 파경으로 치달았던 결혼생활이 이중으로 겹쳐져 늘 암울한 구름에 덮여 있던 그에게 호흡은 오히려 귀찮은 존재였다. 더구나 300년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말기인 당시, 러시아 민중은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숨막히는 공기 아래에서 끝을 모르는 밑바닥 생활에 몸부림치며 고통 받는 국민의 비참한 모습을 섬세한 신경을 가진 차이콥스키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창’에는 러시아 민중의 처절한 상황에 반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작곡가 스스로 최고 역작으로 여긴 마지막 교향곡은 폰 메크 부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으며 러시아 민초들의 애환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마지막 교향곡이...... 레퀴엠에 가까운 분위기로 꽉 차 있다는 상황이 저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1893년 9월에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이미 작곡가는 교향곡이 진혼곡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3년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황실 교향악단(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 ‘비창’을 초연했다. 차이콥스키의 얼굴은 창백했다. 우울한 도입부에 이어 바이올린군이 드디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 대륙의 무한한 생기가 소생되었고, 이면에는 운명의 장난으로 영원히 이별한 폰 메크 부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침내 그 모든 상념은 마지막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집약되어 맥박은 끊어졌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무엇보다 종결부가 떠들썩한 ‘알레그로’가 아니라 정반대인 매우 길게 늘어진 ‘아다지오’라는 점이 청중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는 작곡가에게 또다시 깊은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이미 정신적인 재기는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이미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초연이 끝난 다음날 교향곡은 완전한 제목을 얻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의 집을 방문했을 때 표제를 붙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님 ‘비극적’이라는 표제는 어떨까요?”
장고를 거듭한 차이콥스키는
“‘비창’이라고 하면... 그래 좋아 모디! 부라보! ‘비창’이야.”
라고 말하면서 스코어에 적어 넣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이 또한 차이콥스키에게 죽음을 부르는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1854년 평소 깊은 사모의 정을 품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어머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콜레라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11월 1일 동생 모데스트와 함께 드라마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라이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차이콥스키는 주위 사람들이 말릴 겨를도 없이 끓이지도 않는 네바강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로 다음날부터 발열이 시작되었으며 오후에는 콜라라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는 이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해.” 동생 모데스트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11월 3일에는 약간의 차도가 있었으나 입 언저리에는 콜레라 특유의 반점이 있었다. 마침내 일요일인 11월 5일 의식불명에 빠졌다. 맥박은 더욱 약해졌고 온몸이 땀에 적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 3시 차이콥스키는 갑자기 눈을 떴다. 얼굴에는 뚜렷한 의식이 되살아났다. 그의 옆에 있는 세 사람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더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잠깐 동안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반짝이더니 곧 마지막 숨과 함께 꺼져버렸다. 영혼을 다시금 신께 드린 것이다.
운명은 그에게 신의선물인 천재성을 주었으나 인간의 능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수많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그 누구도 그의 그토록 슬프고도 조화되지 않은 그의 실제 생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확히 12일 후, 초연했던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다시금 ‘비창’이 성대하게 연주되자 비로소 청중들은 오열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1악장의 서주는 아다지오다. 콘트라베이스가 피아니시모로 공허한 울림을 주면 바순이 신음하는 민중의 아픔을 대변한다. 순간순간 다이내믹의 변화를 주며 어두움이 엄습한다. 주부는 템포가 반전되어 알레그로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이것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운명과의 투쟁의 시작이다. 정점을 벗어나면 안단테로 꿈결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현악기로 제시된다. 이야말로 지극히 차이콥스키적인 테마이다. 교대로 나타나는 목관군의 노래는 대단히 몽환적이다. 느닷없이 알레그로 비보의 강주(强奏)로 사투가 시작된다. 억압받는 민중의 봉기이며 작곡가 내면의 용트림이다. ‘비창’의 1악장은 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동시에 이것은 작곡가가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사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두 번째 전개부가 주는 절규는 바로 이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안단테 모소의 최후는 기도와도 같은 경건함으로 끝을 맺는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아가는 느낌이다.
2악장의 4분의 5박자는 그대로 러시아 민요가 된다. 고난 가운데 이따금씩 비치는 햇살과도 같이 천진난만한 미소가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분위기는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다. 중간부의 주선율은 달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감각적인 엘레지의 향기를 풍긴다. 가슴을 타고 흐를 때 한없는 울적함이 드리워진다. 다시 힘겨운 춤이 시작되고 이내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
스케르초가 ‘타란텔라’ 주제로 활기차게 울려 퍼진다. 주제가 진군하는 동안 4박자의 행진곡이 끼어들어 맛을 더한다.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악장 전반을 리드해 간다. 목관군은 여기저기서 목청을 돋우며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금관군의 나팔은 러시아 제국의 위대한 군대의 행진을 연상시킨다. 네프스키 대로를 걸어가는 기마병의 위용이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잘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다가올 죽음에 대한 마지막 절규에 불과하다. 단말마는 광적인 널뛰기로 마감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슬픔이 또 있을까? 고금의 수많은 레퀴엠조차 이보다 더한 비애를 담아내지는 못했으리라. 드디어 피날레 아다지오 라멘토소. 글자 그대로 ‘눈물의 아다지오’로 죽음의 서막은 막을 올린다. 현악기의 주제가 뒤틀려가며 위로 위로 치솟아 올라간다. 그 끝은 결국 천국.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바순이 지옥의 사자 역할을 잘 감당하고있다.
일순간 중간부의 주제가 다시 소용돌이치며 상승한다. 서서히 포르테로 가열되어 모든 악기가 고막이 찢어질듯 울부짖으며 솟구친다. 그 절정에서 팀파니의 두 번 연타에 이어 일순간 숨이 멎는다. 짧은 휴지기는 말할 수 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주체할 수 없는 격한 심장박동은 다시금 비가의 테마가 도드라지는 가운데 제속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대로 죽음에 이르기는 아직 이르다. 통곡은 다시 계속된다. 금관군이 피를 토하며 헐떡이는 가운데 현악기는 파도를 출렁이며 격렬한 몸부림을 친다. 이윽고 탐탐의 짓눌린 일격 뒤에 트롬본과 튜바가 죽음의 문을 두드린다.
콘트라베이스의 흐느낌 위에 고음악기들이 천국의 노래를 슬프게 부른다. 삶의 모든 아픔이 여기에 응집되어 저 세상에의 희망을 갈구한다. 이는 바로 신에 대한 거역 없는 복종의 뜻을 내포한다. 마지막 25마디 현악기의 합주 속에 인간의 숨결은 부드러운 여운으로 침잠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풍진 세상을 뒤로하고 천사의 손에 이끌려 끝내 영혼은 비상한다.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표현되는 마지막 5번의 맥박이 끊어질 때 마침내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그렇게 가야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던 어느 유학생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적으며 기나긴 ‘비창’의 여정을 마칠까 한다.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4악장이 끝이 났지요. 저는 박수가 당연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사도 하지 않고 요지부동인 지휘자와 단원들을 앞에 두고 객석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요. 점점 객석 전체로 확산되더군요. 그때서야 지휘자와 단원들은 조용히 일어서서 그냥 퇴장하더군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때 깨달았지요. ‘비창’ 교향곡의 참된 의미와 러시아 예술의 힘을 말이죠.”
악기편성
플루트 3(피콜로1), 오보 2, 클라리넷 2, 바순 2, 혼 4, 트럼펫 2,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심벌즈, 베이스 드럼, 탐탐, 현 5부
차이콥스키 기념관
2002년 12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눈 덮인 레닌그라드 대로를 2시간가량 달려 클린에 도착했다. 앙상한 자작나무 숲이 온통 하얀 눈으로 채색된 전원마을 클린 한 가운데에 연회색 차이콥스키 기념관이 자리해 있었다. 기념관 내부를 안내했던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직원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신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려 30년 동안 기념관에서 일한 갈리나 이바노브나 기념관장은 이곳의 산 증인이자 누구보다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사랑하는 러시아인이었다.
안내 직원의 설명
지금 저희는 현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념관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거실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사진은 졸업사진인데요, 차이콥스키가 법률학교를 졸업했을 때랍니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원에 입학해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22살에 음악원에 입학했어요.
지금 저희는 작곡가의 침실에 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여느 침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말 값진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작곡가가 작업을 하던 책상입니다. 클린 지방의 마호가니 세공장이에 의해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평범한 것입니다. 이 책상에 앉아서 가장 유명한 작품 교향곡 5번을 완성했지요.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발레 ‘호두까기 인형’ 및 말년의 작품들이 모두 이 책상에서 구상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외국어 서적들이 있습니다. 그는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어요. 체코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잘 했는데, 프랑스어는 아주 유창했습니다. 영어도 배웠고요. 차이콥스키는 문학작품은 원어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 속에 녹아있는 정신은 오직 표현된 언어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죠. 그래서 이 서고에 책들은 모두 러시아어가 아니라 원서들입니다.
화가 꾸즈네츠가 그린 풍경화를 보세요.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차이콥스키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단 하나 밖에 없는데, 바로 그 초상화를 꾸즈네츠가 그렸습니다.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했던 ‘스페이드 여왕’ 리허설 때 초상화를 그렸는데 꾸즈네츠는 차이콥스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는 그런 값진 선물을 쉽게 받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트레챠코프스키 미술관이 그림을 사주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초상화는 현재 그 미술관에 있습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꾸즈네츠는 차이콥스키에게 자신의 작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고 차이콥스키는 이 우크라이나 풍경화를 선택한 것이지요.
이 그림은 차이콥스키에게도 친근한 것이었습니다. 여동생이 데카브리스트(10월 당원) 다비도프의 아들과 결혼을 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답니다. 차이콥스키는 여동생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그래서 그 풍경은 매우 친숙한 것이었죠.
저희는 이 기념관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 와 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보냈던 거실입니다. 책상이 있고 그리고 기념관의 가장 값진 소장품으로서 차이콥스키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는 188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아노 회사인 베께르(Becker)가 선물한 것으로서 10년 후 교체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죽음으로 교체되지 않았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게 피아노는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갈리나 이바노브나 차이콥스키 기념관 관장 인터뷰
- 언제부터 이곳에서 근무했나요?
30년 전에 처음 여기에서 일했습니다. 그때는 연구원이었고 예술후원회 회장을 거쳐 20년 동안 이 훌륭한 기념관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 방문객의 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외국인은 어느 정도 오는지요?
매년 십 만 명 정도가 저희 기념관을 찾고 있습니다. 유물 보존 면에서 볼 때 충분히 많은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집의 경우 그곳은 차이콥스키가 살았을 당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다음 세대를 위해 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문객 수를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곳을 방문해 주는 사람들은 학생들도 있고 러시아 곳곳에서 오고 있습니다.
외국인도 있습니다. 일본, 미국, 독일 등지에서 많이 옵니다. 특히 일본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큰 인기를 끌고 있어 많은 분들이 방문합니다. 한국에서도 음악 애호가들과 관광객들이 찾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연주가들이 저희의 다양하고 폭넓은 음악회에 참여하고 있죠.
저희 기념관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에게 위대한 인간 차이콥스키를 감싸고 있던 믿을 만하고 세세한 물질세계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음악회는 얼마나 열리는지요?
저희는 음악회를 자주 열고 있습니다. 매월 음악회를 엽니다. 그리고 1년에 2번 차이콥스키의 생일인 봄에 그리고 타계한 가을에 음악회를 엽니다. 이 음악회에는 젊은 연주가 뿐 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와 그의 교향악단, 자주 참가한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비츠는 기념관을 방문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을 연주했습니다. 그 밖에 에밀 길렐스, 스피바코프도 한때 참가했었고 엘레나 오브라츠초바와 이리나 아르히포바 등도 이곳에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 정부의 지원이 있나요?
국립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운영자금은 모스크바 지역 정부 예산에서 나옵니다. 임금과 복원, 유지비는 정부의 지원금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념품 판매나 음악회에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부족한 금액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가 원하는 만큼 그리 많지는 않지만 무보수로 일하는 자원 봉사자들도 있고 후원자들도 있습니다. 저희는 러시아 뿐 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기념관의 후원자들이 나타나길 바라고 있답니다.
2003년은 기념관이 11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곳은 러시아 최초의 음악기념관입니다. 110년이면 오랜 역사를 가진 셈이지요. 저희는 기념관 친목 협회를 조직하려 합니다. 모든 음악 애호가들, 차이콥스키 음악을 사랑하고 그의 음악 유산의 보급에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 다양한 단체들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 기념관의 역사
저희가 앉아 있는 곳은 차이콥스키의 동생이며 기념관의 설립자이기도 한 모데스트 차이콥스키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6번 교향곡을 끝내고 차이콥스키가 죽은 후 곧바로 그의 동생은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생각이 실행된 것이지요. 그런 것이 110년이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은 차이콥스키를 대표하는 국가의 중심 박물관으로 변해왔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기념품들을 제외하고도 이곳은 약 200개 정도의 고문서와 유물이 있습니다. 많은 분량의 원고들, 일기, 편지, 자필 사인들, 작곡한 악보, 그의 서고... 이 모든 것들은 음악 애호가들 뿐 만 아니라 차이콥스키 음악 유산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덕분에 저희는 러시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다수의 전시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해외에서 전시회를 많이 열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에서는 저희의 독특한 전시품들을 보여드리지 못했군요. 기념관은 차이콥스키의 음악 유산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대하여
진부한 표현이지만 천재적인 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면과 다양한 의도 아래 계획된 만큼 차이콥스키 음악 안에는 그만의 어떤 비밀스러운 것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 각각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이 갖는 현대성의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차이콥스키 음악에서 자신만의 것,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고 발견해 냅니다.
그는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것이 모두에게 이해되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그 음악을 그저 숭배하고 사랑할 뿐이지요. 평생 동안 그때그때 장르를 바꿔가며 빠져들곤 했답니다. 어느 때는 그의 음악 중 발레음악을 가장 좋아했고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면은 끝이 없답니다. 그는 세계적이고 위대한 거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악의 휴머니즘을 시작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공통된 보편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 기념관 발전을 위한 계획
소장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건물이 공사 중에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기념관에 있는 것들 뿐 아니라 원고 등 희귀본에 근접할 수 있도록 개방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공간도 준비 중입니다.
기념관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인 출판 계획도 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생일에 클린에서 열리는 음악회가 국제적인 페스티벌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교류를 하기를 원합니다. 차이콥스키의 더 많은 작품이 알려졌으면 하는 희망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차이콥스키 작품 중 유명한 것들만 매일 연주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더 풍부하고 다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