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준의 음악이야기 강의자료- 차이콥스키와 교향곡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강의자료
<차이콥스키와 교향곡>
글/사진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 차이콥스키 기념관과 네프스키 수도원 예술가 묘역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 나의 괴로움을 알 수 있다
홀로, 모든 기쁨에서 떨어져 / 먼 창공을 바라보노라
얼마나 내가 고민했던가 /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아! 나를 사랑하고 아는 이들 / 먼 곳에 있으니...
영하 20도의 혹한이 몰아치던 2001년 1월 10일 오후 모스크바 근교 클린시 어귀에 있는 차이콥스키 기념관. 교통체증이 심한 모스크바를 벗어나서 눈 내린 레닌그라드 대로를 타고 2시간을 더 왔다. 단층집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스크바와는 달리 자그마한 집들이 그림처럼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태양은 사라진지 오래. 회색빛에 휩싸인 하늘과 땅, 뾰족 지붕을 한 집들,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벌거벗은 자작나무숲이 끝나면 진회색 전나무가 나타나는, 차이콥스키가 그토록 사랑했던 러시아의 대자연에 묻힌 생의 마지막 9년을 보냈던 하늘색 2층 목조 가옥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가에서, 핀란드만의 황혼 녘에서도 귓가를 맴돌던 차이콥스키의 로망스 ‘다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의 선율이 또다시 스쳐갔다. 러시아 음악의 궁극은 인간의 이러한 애타는 그리움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차이콥스키는 쇠잔해진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서 회복시켰는데, 고독과 정적만이 흘렀던 이 집이야말로 그의 창작의 원천이었습니다.”
마침 휴관하는 날이라 몸소 안내를 맡아준 박물관장 또한 기품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약해질데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이 곳에서 최후의 불꽃을 ‘비창’이라는 이름으로 쏘아올렸다. 회한으로 점철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그는 ‘아다지오 라멘토소’에 투영하여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하는 영혼의 넋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자작나무 숲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중간에 고뇌하는 차이콥스키의 사진이 육중하게 걸려있고 드디어 차이콥스키의 작업실과 침실이 나타났다. 그의 유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안. 시간을 거슬러 19세기 후반으로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곡실의 책상 앞에는 교향곡 6번 ‘비창’의 초고가 놓여 있고 격자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책상에 앉아 마지막 ‘백조의 노래’를 작곡했다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1893년 10월 초,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6번의 지휘를 위해 이 집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월 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겨울은 특히 인간에게 극한의 자연환경을 경험하게 한다. 오전 10시가 지나야 날은 밝아지고 오후 4시면 이내 어두워진다. 외부에 노출되는 것은 얼굴 뿐으로 내쉬는 숨은 이내 얼어붙고 눈썹은 하얗게 된다. 페테르부르크 거리의 연말은 의외로 차분했다. 율리우스력을 쓰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1월 7일을 앞두고 ‘욜카’라 불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운반하는 짐꾼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모피외투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냉혹한 자연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이미 받아들이고 순응해야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빙판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천년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의 남쪽 끝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 내 예술가 묘역의 겨울은 추위로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해 달라붙은 눈꽃이 만개한 앙상한 나무들과 간혹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묘비 앞의 동상은 근엄한 얼굴로 낯선 이방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광대한 대지와 역사의 일치를 그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삶의 무게만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근대 도시의 병적인 아픔을 묘사한 작가였다. 누구보다도 슬라브 지상주의자였고 정교회 신앙을 믿으며 러시아를 사랑하고 페테르부르크를 사랑했던 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그의 묘를 거치지 않고서는 러시아 작곡가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묘를 지나자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는 글린카와 러시아 5인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설립자 안톤 루빈스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의 묘지가 여전히 많은 꽃다발을 앞에 둔 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여름에 다녀갔을 때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간데없고 주위는 온통 흰색뿐인데 휘황한 바람만이 가끔 불어올 뿐 마음은 무거웠다. 또다시 그리움이 스쳤다. ‘비창’의 선율이 온 몸을 휘감아왔다.
십자가를 든 수호천사가 흉상을 지키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묘 앞에는 유난히 많은 꽃송이와 견학 온 학생들이 둘러서 있었다. 교향곡 ‘비창’을 손수 초연하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영면한 그의 음악은 지금도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아! 예술이라는 책임 아래 그토록 고달픈 삶을 살다간 차이콥스키의 무덤 앞에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흙이 되었을 그의 시신이 세월을 거스르고 지금 앞에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비록 생전의 삶은 힘들었지만 당신이 남긴 음악은 지금, 당신은 몰랐던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 중의 하나입니다.” 되뇌이는 머리 위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적막함을 더해주었다.
*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러시아 심포니즘은 러시아 ‘고전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펠라 합창단(당시 황실 합창단)의 지휘자였던 드미트리 보르트니안스키(1751-1825)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 색채가 짙은 그의 작품 ‘Symphony’는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이후 후배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창립자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이 독일 낭만파 교향곡을 모범으로 러시아 교향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차이콥스키는 선배들이 개척한 교향곡 형식에 글린카 이후 국민악파의 러시아 민족주의의 표현양식을 결합해 독특하고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서구음악의 아류가 아니라 진정한 러시아적인 교향악 세계를 완성하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총 6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발라키레프의 요청에 의해 1885년에 작곡한 ‘만프레드’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의 고정악상(Idée Fixe)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독특한 냄새를 풍기지만 교향곡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초기의 1번에서 3번은 러시아의 전원을 그린 소박하고도 민족적인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후기의 4, 5, 6번 교향곡에서 비로소 자신의 개성이 발휘된 완전히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즉 구성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교향곡에 박력 있는 서정성을 추가했으며, 마냥 로맨티시즘에 빠지기보다는 서사적 표현에 의해 전체를 극적으로 통일하여 일종의 교향시와도 같은 장대함을 보여준다. 차이콥스키는 “음악의 형식을 파악하고 조작하는 것에 대한 나의 무능 때문에 한평생을 고민해 왔습니다.” 라며 만년에 쓰고 있다. 하지만 그 ‘무능’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 유산을 잉태한 원인이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첫 교향곡은 작곡가 자신이 부제를 붙였다. 나머지 교향곡들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 의한 애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교향곡 1번에서 4번까지는 모두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모스크바 음악원의 설립자)의 지휘로 초연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모스크바의 러시아 음악협회 연주회를 통해서 발표된 것도 이채롭다. 차이콥스키는 젊은 시절 지휘봉을 잡았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아픔을 가지고 있어서 지휘대에 오르는 것을 극도로 기피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오페라 ‘여자 신’을 지휘하고 자신감을 회복한 뒤로 1887년부터는 직접 자신의 작품을 지휘해 유럽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교향곡 5번과 6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황실 교향악단(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을 지휘해 자신이 직접 초연하기에 이른다.
덧붙일 것은 교향곡 3번만이 D장조로 작곡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단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어린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암울한 그림자가 평생을 관통하면서 복합적인 요인이 더해진 그의 삶을 반추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인간’ 으로서의 끝없는 좌절은 그의 교향곡 도처에서 너울거리고 있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몽상(Winter Daydreams)’은 전곡을 통해 러시아 민요풍의 선율이 넘친다. 마지막 악장은 혁명적인 민중의 노래를 사용했다. 초기의 나로드니키(Narodniki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농본주의적인 급진 사상을 부르짖은 인민주의파)적인 경향 엿볼 수 있다. 1악장 ‘겨울 여행의 몽상’, 2악장 ‘음산한 땅, 안개의 땅’, 3악장 스케르초에 이어 4악장에는 1861년 카잔에서의 학생운동 가요 ‘피어나라 작은 꽃이여!’가 주제선율로 등장한다. 격동의 로마노프 왕조 후반부, 농노 해방기 러시아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교향곡 2번 ‘소러시아’는 1악장과 4악장에 우크라이나(소러시아인, 즉 마롤로스의 거주지가 되었던 폴란드 국경지대 우크라이나 땅) 민요가 사용되어 당시 러시아 최고의 음악평론가였던 스타소프가 이름붙인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여동생 알렉산드라에게 많은 의지를 했는데, 음악원 시절 방학이 되면 우크라이나의 카멘카에 있는 알렉산드라의 시집인 다비도프 가에서 보내곤 했다. 이 때의 기억이 음악 속에 담겨 있다.
교향곡 3번은 D장조로 ‘폴란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피날레에 ‘폴로네즈’가 등장하는 것을 두고 런던 연주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정작 러시아에서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는다. 5악장 구성의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국민주의를 이탈해 모음곡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교향곡 4번은 후기 교향곡의 첫 걸작이다. 가장 변화가 많고 열정적인 곡이며 고뇌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 즉 차이콥스키 자신의 모습이 이때부터 그려진다. 제자이기도 했던 타네예프에게 “내가 진정으로 느낀 것만을 쓴 것이며 나의 깊은 마음속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라고 쓰고 있다.
1977년 안토니아 밀류코바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민하던 때의 산물이며 나제주다 폰 메크 부인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의 시작점에서 쓰여져, 감정의 기복이 하늘과 땅을 오간다. 1878년 1월 7일 이태리 산 레모에서 완성해 표지에 ‘나의 가장 좋은 벗에게’라고 기록했다. ‘가장 좋은 벗’인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했다.
*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작곡연대: 1888년
초연: 1888년 11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
연주시간: 약 45분
운명, 왈츠 그리고 낙관주의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1876년 말 36세의 모스크바의 젊은 작곡가에게 45세의 부유한 철도사업가의 미망인 폰 메크부인은 편지를 보냈다. 이때부터 13년 간 1,200통의 편지가 둘 사이에 오가며 극적인 사랑의 막이 올랐다. 폰 메크 부인은 1877년부터 매년 6천 루블이라는 거금을 차이콥스키에게 지원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적인 궁핍으로부터 벗어난 작곡가는 잇달아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애정이 담긴 철학적인 내용의 편지는 차이콥스키의 모든 내면의 심정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하루에 열통 이상을 쓰기도 했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 밀류코바(당시 28세)와 1877년 7월 6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예술을 모르는 아내의 열렬한 구애에 밀려 애초부터 결혼 생각이 없었던 차이콥스키는 한 달 만에 별거에 들어가고 죄책감에 못 이겨 모스크바 강으로 들어가 자살을 꾀하지만 미수에 그쳤다. 결국 9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동생 아나톨리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기에 이른다.
185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상처는 차이콥스키의 안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9년 후에 자신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병으로 하늘나라로 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여기에 밀류코바와의 결혼은 연약한 남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울을 더했다. 여성에 대해 정신적인 공동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음악은 그토록 정열적이고 관능적이었지만 이성적인 교제는 영혼의 접촉만으로 그에게 충분했던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불행한 삶을 마쳤던 밀류코바에게도 차이콥스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언제든 돈을 부쳐주곤 했다.
여기에 당시 러시아 민중의 참상은 정의감에 불타는 작곡가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무너진 서유럽의 농노제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인구 6천 5백만 가운데 노예와도 같은 농노가 4천만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처참하고 피폐했다. 이미 예카테리나 2세 때 푸가초프의 반란으로 한차례 농노의 저항움직임이 있었지만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1858년 한 해에만 378건의 농민폭동이 일어날 만큼 러시아는 휘청대고 있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법을 폐지했지만 이름뿐인 해방이었으며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더욱이 1891년부터 일어난 대기근은 기름에 불을 끼얹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러시아와 러시아 민중을 사랑하며 ‘인민에게로’의 성향을 띠고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직접 몸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자신의 음악 안에 당시의 눈뜨고 볼 수 없는 인민의 고통을 녹여놓았다. 더불어 1880년대 말부터는 스스로도 인생의 황혼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삶의 마지막 안식처인 클린의 저택을 1885년에 사들여 죽는 날까지 자연에 묻혀 작곡에 몰두했다.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교향곡 5번, 6번, ‘만프레드 교향곡’, 피아노곡, 로망스,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욜란타’가 모두 클린 시절에 발표된 만년의 작품들이다. 교향곡 5번은 이러한 복잡한 환경이 만들어낸 소산이었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 대작 교향곡 작곡에 착수, 11월 5일 자신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에서 초연했다. 새로운 교향곡도 이전의 작품들과 유사하게 그의 개성이 담긴 자기회의와 내면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다. 음색, 감정의 고조, 악기 사용의 참신함, 구조와 배열의 논리성 등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든지 이 5번 교향곡은 감성과 지성에 호소하는 그의 관현악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나타 형식의 1악장은 도입부 ‘안단테’와 이어지는 ‘알레그로 콘 아니마’로 구성되어 있다. 서주 첫머리에 클라리넷이 노래하는 무거운 선율은 바로 ‘운명’의 단편으로 교향곡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자신의 불행과 러시아 민중의 아픔이 단말마처럼 어둡게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가장 차이콥스키적인 모습에 여기에 있다. ‘알레그로’에서 세 개의 아름다운 주제가 제시되는데, 전개부는 교향곡 4번에 나타났던 차이콥스키의 주제 처리 기법을 잘 보여준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알쿠나 리첸차’는 3부 형식을 취한다. 저음 현에서 연주되는 일곱 마디의 전주 뒤에, 낭만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주제가 혼 고유의 음색으로 연주된다. 너무도 아름다운 음의 나열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오보에로 연주되는 부드럽고 달콤한 부주제는 첼로의 선율 위에서 다시 주선율로 인도된다. 이 부분은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클라리넷에 나타나는 중간부 선율은 외롭게 표현된다. 중간부 이후에, 기본 주제는 몰아치듯이 연주되다가 곧 세 번째 부분으로 넘어간다.
3악장은 미뉴에트나 스케르초가 아닌 3부 형식의 왈츠이다. 이것은 곡을 고상하고 독창적으로 꾸미고 있다. 왈츠는 전적으로 발레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차이콥스키에게 있어 고통 받는 세계로부터 가상적인 우아함과 어여쁨이 있는 세계로의 탈출을 의미한다.
4악장은 론도 소나타 형식인데, ‘안단테 마에스토소’로 시작하며 제1주제는 장엄하게 연주된다. 그 다음 팀파니의 크레센도에 의해서 ‘알레그로 비바체’가 이어지고 활기 넘치는 제1주제는 관현악의 총주로 나타난다. 제2주제는 에너지가 충만한 추진력 안에 내재된 외로운 정서를 보여준다.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제1주제는 코다에서 장대하게 터져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1악장의 주요 주제가 다시 등장하면서 전곡은 힘 있게 끝을 맺는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가장 러시아적으로 빚어낸 지휘자는 누굴까? 수백종이 넘는 음반이 쏟아져 나왔지만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50년 동안 이끌며 러시아 음악에 관한 한 최고의 해석을 보여주었던 전설적인 거장 예프게니 므라빈스키를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다. 특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쇼스타코비치의 그것과 함께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렸던 므라빈스키의 연주야말로 최고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다음은 1982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00주년 기념 연주회 후 저명한 러시아의 음악평론가 안드레이 졸로토프가 므라빈스키와 가졌던 인터뷰 내용이다. 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귀중한 내용이다.
므라빈스키(므): 오늘 청중들은 매우 좋았어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죠. 젊은 청중들도 연주에 협조적이라 느꼈습니다.
졸로토프(졸): 특히 1악장 마지막의 피날레는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이 잘 표현되었는데...
므: 1악장은 로맨틱한 것을 제거하고 뉘앙스, 템포 등을 염두에 두고 오랜 동안 사유(思惟)하는 듯하게 표현했어요. ‘운명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도출된 테마로서 ‘운명의 메트로눔’이라 느끼게끔 지휘했죠. 제 생각으론 많은 지휘를 하게 되면 혼신의 힘을 다하더라도 매너리즘이란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녹음하느라 피로가 남아있어 오늘은 몸이 좀 무거웠는데 잘 해냈어요. 그래서 1악장은 조금 변화를 주었죠.
졸: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연주는 오늘이 150회 째인데 많이 연주한 곡이 아닌가요?
므: 연주회수를 말하자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이 더 많을 겁니다. 두 개의 심포니를 가장 많이 연주했는데 하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고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과 정말이지 이 두 곡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연주한 작품일 것입니다.
졸: 지휘자로서 차이콥스키의 지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므: 그의 지휘에 관하여 기술한 책이 있습니다. 당시 그가 지휘한 교향곡 5번에 관한 비평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작품을 표현하는데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비평가들이 3악장 왈츠의 연주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졸: 왈츠라면?
므: 3부 구조의 왈츠인데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고 나서야 재평가 받게 되었죠. 같은 음악가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른 대접을 받는지... 차이콥스키도 이 점엔 책임이 있어요. 그는 지휘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서 왼손을 턱에 대고 지휘했다고 해요. 흔히 볼 수 없는, 마치 어린아이의 귀여운 모습이라고 할까...
졸: 제5번 교향곡중의 왈츠는 모음곡을 연상케 하며 무언가 일관된 것이 있다고 느껴지는데..
므: 그것은 간주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간주는 다른 테마를 연결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테마를 도출해내죠. 여기에서 테마는 그의 ‘운명’ 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간주곡입니다.
졸: 논쟁적이지만 마지막 악장은 표출하고 싶은 주장이 있었나요? 당신은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연주에 임하는 것 같은데...
므: 마지막은 악장은 ‘낙관주의’ 라고 봅니다. 1악장의 주요 주제를 기반으로 음악적인 요소는 앞에서 결정되었더라도 장조가 주요한 선율이자 강조되고 있죠.
졸: 전임 지휘자인 프리츠 쉬티드리가 당신의 연주에 처음 입회한 것은 언제입니까?
므: 1937년입니다. 당시 나는 젊었고 지휘하는 표현이 서툴러서 팔의 움직임은 컸고 손은 넓게 폈었죠. 그래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충고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연주 시작 벨이 울리면 바로 들어와서 무대 측면의 피아노 옆에서 손을 턱에 괴고 연주하는 것을 들었어요. 연주가 끝나면 내게 독일어로 '정말 훌륭해, 전문가야!' 라고 말하면서 격려해주었습니다.
졸: 오늘도 정말 훌륭했어요. 나는 당신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연주는 적어도 20번 이상 들었는데 운 좋게도 1960년에 외국 연주여행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태리, 오스트리아에서의 연주 때도, 그리고 금년의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그런데 그 때마다 연주의 느낌이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데, 새로운 지형과 건물, 분위기 등 때문입니까?
므: 예를 들어 두 번의 연주회에서 같은 작품을 똑같이 두 번 연주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고, 또 그렇게는 연주되지도, 존재하지도 않지요. 비록 내가 기술적인 면과 템포, 연주 구성원들이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각각의 연주 속에는 항상 그 차이점이 존재하기 마련이구요, 다른 요소들로 연결되는 것이죠. 나 또한 어떤 점들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지, 또 공연한 같은 작품들이 매 번의 연주 속에서 어떤 차이점들로 표현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졸: 금년은 교향악단 창립 100주년인데 청중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므: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항상 기쁜 일입니다. 일하는 것 또한 그렇고요. 감사합니다.
악기편성
플루트 3(피콜로1) / 오보 2 / 클라리넷 2 / 바순 2 / 혼 4
트럼펫 2 / 트롬본 3 / 튜바 / 팀파니 / 현 5부